루이비통의 역사
어린 루이비통
루이비통의 역사는 1800년대부터 시작했습니다. 루이비통은 1821년 프랑스 인쉐라의 작은 마을의 목공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루이비통은 어릴 때부터 파리에 대한 동경심이 강했는데 14살이 되고서 파리로 무작정 떠났습니다. 무일푼이었던 루이비통은 무려 서울-부산 거리인 400km를 걸어서 갔는데 16살이 되어서야 파리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후 파리에서 가방 제작으로 유명세를 탄 무슈 마레샬 아래에서 제자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루이비통의 섬세하고 세련된 기술로 곧장 유명해졌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알려지게 됩니다. 많은 양의 짐을 싸는데 탁월한 기술을 갖췄던 루이비통은 프랑스 왕실 외제니 드몽티조의 전담 PACKER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외제니 황후의 후원 아래 카푸신 4번가에 자신의 이름을 건 패키지(포장) 회사를 개업했습니다.
루이비통의 포장회사
이 포장 회사가 오늘날의 루이비통의 역사가 되는 회사입니다. 당시 캐리어는 지금의 사격형 모양이 아니었습니다. 둥글게 생겨 쌓기가 힘든 모양이었는데 루이비통의 트렁크는 평평하게 만들어서 마차에 쌓기 유리한 구조였습니다. 모양뿐만 아니라 기존의 나무재질에서 목공기술을 살려 특별한 제작을 하였고 그레이 트리야농 캔버스의 소재를 활용하여 가볍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혁신적인 트렁크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기존 매장에서 수요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1859년 파리 근교 아니에르에 공방을 세우게 됩니다. 아니에르에 있는 이 트렁크 공방은 지금까지도 트렁크 제작을 하는 아주 특별한 장소로 알려져 있는데 1885년에는 영국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매장을 열면서 첫 해외지점도 오픈했습니다.
루이비통의 아들 : 조르쥬 비통
루이비통의 획기적인 기술과 명성은 아들 조르쥬 비통에게도 이어졌습니다 1886년 당시 소매치기가 성행하다 보니 소매치기들이 가방을 쉽게 열지 못하도록 가방에 자물쇠를 부착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냈습니다. 너무나도 완벽한 기술이었기 때문에 잠금장치 기술은 아직까지도 요긴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루이비통의 대성공으로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의 모조품들이 판을 치자 1888년 새로운 재질의 제품을 개발하게 됩니다. 이때 나온 것이 루이비통의 대표적인 제품인 아래 그림의 패턴, 다미에 캔버스입니다.
다미엔 캔버스가 다소 단조로운 패턴이다 보니 모조품들이 끊임없이 나오자, 아래 그림 패턴인 1896년 루이비통의 상징적인 패턴, 즉 모노그램 캔버스가 탄생했습니다.
조르쥬는 모노그램 제품들을 들고 튀니지 사막을 횡단하며 견고성을 시험할 정도로 사력을 다했습니다. 창업주 루이비통이 죽고 경영권을 이어받은 조르쥬 비통은 회사를 더욱더 성장시키게 됩니다. 1914년에는 샹젤리제 거리에 세계에서 가장 큰 여행제품 매장인 7층짜리 매장을 세웠습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 임명
2013년 11월 마크 제이콥스가 떠나고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렌시아가를 맡고 있던 니콜라 제스키에르(Nicolas Ghesquière)가 임명되었습니다.
전임인 마크 제이콥스는 새 일자리 대신 자신의 두 레이블에만 집중하였는데 루이비통의 클래식 팬들은 마크 제이콥스가 너무 상업적인 방향으로 브랜드를 밀고 나가 럭셔리 브랜드로서의 가치를 낮게 만들었다는 평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떠난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루이 비통 여성 컬렉션에 현대적이며, 창조적인 시각을 불어넣고 1854년부터 메종의 핵심 가치로 자리잡아 온 세련미와 장인정신, 최상의 품질을 두루 갖춘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는 “루이 비통은 나에게 늘 궁극적인 명품의 상징이자, 혁신과 탐험의 대명사였다”면서 “이 같은 임무를 맡게 되어 매우 영광이고 이처럼 위대한 메종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어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전했습니다
오프화이트 창립자 버질 아블로 영입
한편, 2011년부터 남성 부문을 이끌던 킴 존스가 2018년 가을, 겨울 컬렉션을 끝으로 디올로 건너가며 루이비통을 떠났습니다. 이후, 오프화이트의 버질 아블로가 새 수석 디자이너가 됐습니다. 파격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버질 아블로는 가격대가 낮은 브랜드가 아니긴 해도 역사 역시 굉장히 짧은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의 수장을 한 반면에, 럭셔리 중에서도 하이엔드급 브랜드인 루이 비통의 남성 부문 디자인 수장이다 보니 인사조치가 상당히 파격적이라는 평을 받은 것입니다. 루이비통 역사상 첫 흑인 디자이너라는 점 역시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다만 암투병 중 향년 41세 이른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이상 명품이야기-루비비통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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